이번 부산에서 맛본... Sigmund Groven

털보의 고향, 부산엘 가면 필수로 들러야 할 곳 세 군데가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계신 본가, 어머님의 유택, 그리고 처갓집입니다.

애초 이번 부산행의 목적은 본가와의 일이었기 때문에
24시간 정도의 체류 정도인, 짧은 여행이려니 여겼습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하고 보니 울산에 계신 형님께서 본가에 와 있어,
모처럼 함께 하는 술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하루를 몽땅 본가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일정은 그렇게 원래의 계획과는 자주 어긋나곤 하죠...)

이틑날 노부가 끓여준 복지리로 속을 풀고 있자니,
이제 1년 정도 인연을 맺은 손아래동서가, 서울에 있는 털보가 모처럼 왔다고
술한잔 같이 해야되다며 성화가 심했습니다.
저녁에 처가로 건너가 함께 보자며 전화를 끊고 나니,
이제는 국민학교 동창들로부터 연이어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이 녀석들은 언제나 필수가 아닌 옵션이었는데,
한동안 뜸했는지라 피하기가 어려운 자리였습니다.

저녁에 손아래동서와 처갓집에서 지내야 하니 동창 얼굴을 볼 시간이 낮시간밖에 없더군요.
전화를 준 녀석의 사무실을 일찍 찾아 변명을 둘러대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러나 녀석의 사무실에 도착하고 보니,
나를 만나기 위해 그날 저녁 약속을 다 취소했다며 뭇내 아쉬운 얼굴을 했었습니다.
꼭 저녁에 술을 마셔야 된다는 법은 없으니 낮술이나 한 잔 하면서 회포를 풀자 하였더니
이내 어디로가로 전화를 한통 걸고는 광안리로 향하자고 하더군요.
광안리 회센타 10층에 선배가 하는 횟집이 있답니다.
횟집에서 앉은 자리는 마침 서쪽.
하늘의 해가 바다에 비쳐 금빛 광안리를 만드는 모습을 보자니
절로 술잔이 입으로 가져가졌었습니다.
그렇게 한 두잔을 거듭 하다 보니 처가에 갈 시간이 되었지만,
오늘 서울 출장간 놈이 막 비행기를 타고 그 자리로 오기로 했다는 둥,
친구녀석이 영 헤어지기 섭섭타는 얼굴을 해 대었습니다.
이런, 난감할 때가...
장모님께 전화를 걸어 사정을 이차저차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
그날은 친구들과 함께 광안리를 마셔버렸습니다.
결국 몽롱한 정신으로 처가집을 찾아가 뻗어야만 했지요...

구수한 갈치조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냄새를 맡으며 몸을 일으켰습니다.
사위가 제일 좋아하는 갈치조림을 하느라 처가집의 부엌이 부산한 듯.
부스스한 얼굴을 하며 장모님께 아침 문안을 드리고... 갈치조림으로 해장을 했습니다.
어제 못다한 동서와의 약속을 위해 이제 저녁까지 처가에서 기다려야 할 판...
아직까지 시간은 많이 남았고, 저녁 술상을 보기 위해 장모님은 외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장모님께서 외출하자마자 털보도 외출을 했습니다.
갈치조림으로는 조금 미진하다 싶어, 털보가 늘 즐기는,
그러나 수도권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돼지국밥'으로 해장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시장어귀에서 퍼져 나오는, 수도권 사람들은 질색할, 하지만 구수한
돼지 냄새가 퍼져 나오는 국밥집으로 들어서 국밥 한 그릇을 주문했습니다.
이윽고 나온, 수육이 둥둥 떠다니는 허연 돼지사골육수.
새우젓의 새우만 골라 국물에 풀어 넣습니다.
대충 짜운 간을 보고 젓갈에 잘 버무려진 정구지(부추의 부산사투리)를 국물이 안 보일정도로 가득 채웁니다.
그리고 마무리 양념으로 된장을 조금 넣고...
수육 한 점씩을 정구지와 함께 집어 들고 새우 몇마리와 깨물어 먹습니다.
어느새 국밥그릇의 수육과 정구지는 없어지고 조금은 벌건 국물만 남으면,
거기에 밥 한 그릇을 말아
잘익은 깍두기와 함께 어적대며 국밥을 깨끗이 비웁니다.
아, 이제 정신이 조금 듭니다.

처가로 돌아오니 아직 장모님도, 동서도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무엇으로 시간을 보낼까...
오디오 매니어인 장인어른의 오디오로 음악이나 들어볼까...?
그래...
그런 마음으로 장식장에 비치된 CD 여러장을 이래저러 들쳐보았습니다.
각양각색의 클래식 음반들,
가끔 가다 나오는 오래된 가요음반들,
처제가 잘 들을 요즘의 가요음반들, 댄스음반들...
별로 털보의 취향에 맞는 음반은 없었습니다.
이리저리 뒤적이다 초록과 연두로 포장된 CD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이건 뭘까...

파워앰프에, 프리앰프에, CD 플레이어에 전원을, 차례차례 넣고 난 다음,
좀 전에 보았던 CD를 플레이어에 밀어 넣고 play 버튼을 눌렀습니다.

부산으로 내려오기전 Toots Thielemans의 하모니카를 들어서일까요...
우연히도,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하모니카 소리였습니다.
구슬프기도 하고, 발랄하기도 하고, 켈틱음악같기도 한 하모니카...

그러다 9번 트랙의, 바그다드 카페의 주제음악이었던 Calling you가 방안 가득 흩어져 나왔습니다.
Javetta Steele의 목소리 이후 많은 가수들과 연주로 리메이크되었던,
그중에서도 William Gallison의 하모니카로 유명했던 calling you였는데,
이건 좀 독특한 하모니카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제서야 CD 케이스에 껴 있는 설명서를 열어봤습니다.
Sigmund Groven.
스웨덴 출신의 하모니카 연주자, 하모니카 아티스트로서는 최초로 카네기홀 공연... 같은 엄청난 수식어로 포장되어 있는 설명서...(털보는 이런 수식어만 가득한 설명서를 제일 싫어합니다...^^)

설명서에서 눈길을 거두고 가만 눈을 감았습니다.
음악은 자고로 마음으로 느껴야 하는 것...
하모니카는 30가지나 되는 연주법이 있다고 했는데,
이 사람은 기교도 기교이지만 무언가가 느껴지는 사람이다...

...

부산에 와서 모처럼 푸근함에 젖어드는 순간...
조금전 포만하게 만든 돼지국밥 탓은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Posted by 털보

2004/01/05 15:23 2004/01/05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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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asy 2004/01/26 09:25 # M/D Reply Permalink

    구수한 갈치조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 하네요..오늘 점심은 갈치조림으로 결정했습니다. 부산에서 많은 것들을 맛보고 오셨네요. 늘 맛있는 것이 가득한 '털보네 뮤직식당~~'

  2. 털보 2004/02/04 20:57 # M/D Reply Permalink

    너무 늦게 답을 드리는군요..^^ 털보가 요즘 좀 홈피를 게을리하나 봅니다.
    반성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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