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악사 - 그 여름의 추억


1991년 5월 중순.
처음 사회에 발을 디디고 난 뒤 2년여.
갑자기 하는 일이 짜증스러워졌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했더라면 다른 부서로 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직 그 나이가 어렸을 성 싶다.
관공서를 상대로 하는 일이었는데 툭하면 지갑을 벌리는 공무원을 매일 상대하는 것이 지겨웠던 것이다.
세상을 살아나가기 위해 그런 일도 한번쯤은 배울만 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일을 2년 이상 해내기에는 나의 기가 드세었던 것 같다.

늘 업무에 염증을 가지던 중에 친구와 선배들로부터 새로운 일을 해 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이른 바 산업교육이벤트.
쉽게 말하자면 회사의 신입사원교육, 경력사원교육 같은 것들을 위탁받아 진행하는 사업이었다.
내가 맡았던 일은 프로그램 기획.
IT에서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프로그램 같은 것이 아니라
어떤 교육을 하고 어떻게 진행하고 강사는 누가 하고
어떨 때 이런 감정을 끌어내야 한다는 그런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이 나의 주업무였다.
기구를 타고 올라가서 자신감과 진취성 배양하기,
이와 유사한 번지점프, 래프팅, 오리엔티어링 등등
당시로서는 조금 획기적이었던(?) 것들을 프로그램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우리는 갓 만들어진 조직이었고
그만한 일을 해내기에는 자금력과 조직력이 없었다.

더운 여름으로 막 접어들 무렵,
우리의 첫 일로 모자동차 부산영업소 전 여직원 연수 교육이 접수되었다.
1박2일짜리 프로그램이었는데 캠핑과 오리엔티어링, 캠프파이어,
화합의 마당, 소규모운동회 등이 전체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전체 프로그램을 놓고 세부 기획에 들어갔다.
상세한 타임스케줄을 두고 인원배치, 각자의 Role, Communication Plan을 짜서 팀원들에게 알려주었다.
그 다음에는 진행 사이사이에 들어갈 음악을 골랐다.
그때 메인 타이틀로 잡았던 곡이 바로 "거리의 악사"이다.
중간중간 나오는 호루라기 소리까지 따라할 정도로
이 음악은 그 당시의 나에게는 무척이나 친숙해 있었다.

그 첫번째의 프로그램은 성공적이었을까...?
첫 날의 일정은 매우 순조롭게 흘러갔고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시작하는 오리엔티어링과 소규모 운동회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부터 엄청난 비가 내렸다.
둘쨋날의 일정은 모두 야외에서 벌어지는 것이었는데, 비가 왔으니...
우선 새벽의 오리엔티어링은 취소하고 피교육자들에게 아침식사를 지시한 후
팀원들끼리 긴급히 모여 회의를 했다.
적어도 퇴소식까지는 네시간 정도가 비는데,
이것을 어떤 프로그램으로 대체하느냐가 걱정이었다.
많은 경험이 쌓여 있는 우리였으면 아무 문제도 아닌 것처럼 해결할 수 있었겠지만,
그 프로그램은 우리의 첫 경험...

'미니운동회를 하자~!'
누군가 그렇게 제안을 했다.
'미니운동회가 어떻게 하는거냐...?'
'xxxx....'
'OK~!'

피교육자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긴급 미니운동회 프로그램이 마련되었다.
강당의 의자들을 모두 벽쪽으로 나란히 붙여 놓고 실내에서 벌어지는 미니운동회.
말 그대로 행동반경 적게 움직이는 운동회를 하기로 한 거다.
그 중에 압권은 '얼굴에 붙은 종이 떼내기'.
신문지 등을 밴드 크기로 자른 후 물을 묻힌 후 얼굴에 다섯개 정도 발라 놓고
손대지 않고 떼어 내는 종목이었는데,
온갖 인상을 다 찌푸려야만 겨우 떼낼 수 있을만큼
고난도의 기술(?)을 요하는 게임이었다.
고난도의 기술이 나올 때마다 일그러지는 그 얼굴들이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올 만한 것인데,
이때 우리 팀이 찍어 피교육자들에게 전해준 비디오가
그후 몇년뒤 "일요일 일요일밤에" (주병진, 이경규진행)
시청자 비디오 코너에서 대상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이 미니운동회가 벌어지고 있는 사이, 거리의 악사는 쉼없이 흘러 나왔다.

그 때를 같이 했던 나머지 여섯명의 동료들은 지금 무얼 하는지...


[img:Imagebank02.gif,align=,width=76,height=87,vspace=0,hspace=0,border=0]

Posted by 털보

2003/11/17 01:51 2003/11/17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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