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오랜만에 커피 한 잔을 끓여 머그에 담은 후 책상에 앉는다.

인스턴트에 익숙한 지라 머그에 먼저 마실 양만큼 물을 따라 그 물을 다시 주전자에 부어 가스렌지로 끓인다. 그 동안 커피 두 숫갈, 크림 두 숫갈, 노란설탕 두 숫갈을 찬장에서 찾아 꺼내어 머그에 담다 보면 주전자는 이미 끓는 물 때문에 쉬익쉬익 소리를 낸다. 주전자에서 머그에 물을 따르면 완벽한 커피 한 잔이 나온다. 주전자는 씻어 놓을 이유도 없이 미량의 물을 여전한 온기로 증발시켜버릴 것이다.

이렇게 커피를 끓이는 방법을 이야기했더니 오래전 어떤 지인이 원두커피를 마셔볼 것을 권유한 적이 있다. 내가 그다지 이 맛, 저 맛 따지는 미식가가 아니기에 사양을 했었다. 대신 인스턴트 커피로 원두커피 맛을 내는 방법을 그 지인에게 일러 주었다. 그 방법은 아주 오래 전 (아마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지 싶다) 커피점에서 일할 때 동갑내기 주방장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인스턴트 커피로 원두커피 맛을 내려면 우선 마실 양의 1.2배 정도의 물을 끓이고 물이 끓고 나면 불을 아주 약하게 낮춘 후 평소의 커피 양 만큼을 주전자에 넣어야 한다고 했다. 이때 주의할 점은 절대 거품을 내며 끓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커피점에서도 제일 주의하는 것은 하물며 원두커피라 하더라도 절대 끓여서는 안된다는 것이 불문율이라고 했다. 이 커피를 머그에 담아 마시면 원두커피 맛이 난다고 했다. 몇 번 끓여 먹어 보기도 했지만 나는 그 맛을 차별나게 할 만큼의 재주가 없었던 것인지, 아님 커피는 그냥 커피일 뿐이라고 치부해서인지 이내 그렇게 끓여 먹는 커피를 사양하게 되었다. 오히려 주전자를 씻어야 하는 귀찮음만 더한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물론 이 귀찮음에 대해서는 원두커피를 권유한 지인에게 말하지 않았다.

직장에서는 이렇게 끓여 먹는 커피를 맛 본 적이 거의 없다. 전용 비서를 둔 높은 분들을 만날 때는 예외이겠지만, 물만 부으면 자동으로 더운 물이 나오는 세상이고 보면 그냥 더운 물에 커피와 크림과 설탕 두 숫갈씩을 더해 마실 뿐이다. 이렇게 하루에 서너잔을 마실 때의 기분은, 한마디로 아무 생각이 없다. 단지 내 몸이 커피를 원할 뿐이고, 내 손과 입은 그 요구에 대응을 해 줄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분을 없애기 위해 친한 직장동료와 같이 커피 한 잔을 나누려고 하다 보면 상대방은 커피를 원래 싫어한다, 방금 마셨다, 밖에서 손님 만날 때 커피 마시느라 커피가 질렸다, 나는 녹차를 마실테다 등등의 이유로 커피 한 잔과 함께 할 수 있는 여유를 느끼지 못한다.

오늘 저녁, 토끼와 여우를 재운 후 호젓한 기분으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보니, 외려 이 커피 한 잔으로 내가 조그만 여유와 만족을 가지는 느낌이 든다. 일상적인 커피 한 잔의 느낌과는 딴 판인 셈이다. 내일 다시 일상속에서 커피 한 잔을 대한다면 오늘의 이런 느낌으로 마주할 수 있을까...

배경음악 : Coffee Break - Billy McLaughlin


Posted by 털보

2003/10/30 22:54 2003/10/30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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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asy 2003/10/31 11:51 # M/D Reply Permalink

    털보님이 느끼신 커피 한 잔의 여유가 글에서도 느껴집니다...커피는 실제로 느끼는 맛보다 '커피'라는 단어에서 주는 향이 더 진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전 기분이 멜랑꼴리(?)해 질땐 원두커피를 마시고, 평상시에는 갖은 양념을 다한 다방커피를 마시죠. 커피를 맛있게 먹는 방법 하나 알려드릴까요?
    멋진 분위기를 한 스푼 넣어주고, 여기에 말이 통하는 좋은 사람과의 대화 열스푼, 그리고 뮤직메일에서 추천한 배경음악 한스푼 넣어서 잘 섞어주면 더 맛있어 진답니다. ^^

  2. 털보 2003/10/31 13:26 # M/D Reply Permalink

    지원님의 커피에 '사랑', '여유', '행복', '건강', 그리고 '너'를 쓰며 저으면 더 달콤해질 것 같네요...^^

  3. 김석진 2003/11/04 21:37 # M/D Reply Permalink

    커피는요....창넓은 찻집에서 다정스런 눈빛으로 마주보면서 마셔야 한데요...(어디서 많이 들은 듯한 멘트죠? *^^*)

  4. 털보 2003/11/05 11:22 # M/D Reply Permalink

    어제 귀가길에 '동행'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왔었는데...
    그 가수의 노래가사이군요...^^
    회원등록하시고 첫 댓글 달아주셨네요... 김석진님, 환영합니다.

  5. 초록숲길 2003/11/13 01:23 # M/D Reply Permalink

    털보님의 글도 좋지만, 여기 오면 주고 받으시는 리플님들의 글들도 참 정겹습니다^^

  6. xanadu 2003/12/03 12:07 # M/D Reply Permalink

    원두커피 끓이는 법도 달걀 찜이랑 비슷하군요...불을 약하게...^^*
    달걀찜하는 법을 어제 배웠거덩요...^^
    업무보면서 커피 마시는 것보다
    님처럼 가만히 응시하고 만지고 느끼면서 마셔야겠습니다.^^*

  7. 털보 2003/12/04 21:06 # M/D Reply Permalink

    원두커피와 달걀찜... 그렇군요... 저도 좋은 것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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