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가끔은 지각을 하자.

전날 술이 좀 과했는지 도대체 제 시간에 일어날 수가 없다.
아내는 몇번을 흔들어 깨웠지만, 겨우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곤 '천천히 갈래'였다.
또다시 잠으로 빠진다.
자명종이 울리는 소리에 손을 더듬어 시계를 찾아 스누즈 버튼을 누른후 가만히 시계판을 들여다 본다.
8시 40분.
'벌써 사람들은 출근을 했겠군...'
먼저 출근을 했는지 아내와 아이는 보이지 않고 시계의 알람시간은 5시 40분에서 8시 40분으로 옮겨져 있다.
아내의 배려를 저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어느새 휘청.
'아... 이제 술은 그만 마셔야지...' 예의 다짐을 하며 회사에 전화를 건다.
'응, 난데... 조금 늦게 출근할 것 같애... 윗분들께 말씀 좀 잘 드려...' 똑깍.
욕실에서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앉아 늘 아침나절에 읽을 엄두를 내지도 못하던 신문을 펼친다.
이왕 늦은 김에 좀더 느긋해질 요량으로 1면부터 40면을 주욱 읽는다.
그리고 경제섹션 16면을, 그리고 스포츠섹션 12면을, 그리고 오늘의 특집12면을 아직 술독이 풀리지 않은 시선으로 이리저리 훓어본다.
9시 30분.
속이 거북해 뭐 국물이라도 없을까 싶어 주방을 기웃거려보지만 딱히 먹을게 없다.
라면을 끓여 먹어볼까 하다가 국물은 들어가겠지만 건더기는 차마 다 먹지 못할 것 같아 그냥 둔다.
냉장고를 열어 음료수 두잔을 연속 들이킨다.
노트북을 열어 간단히 이메일을 체크한다.
오늘이 뮤직메일 발송임에도 불구,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인터넷 뉴스를 이것저것 살피다 보니 어느새 10시 20분.
이제 회사로 나가봐야겠다. 도착할 즈음이면 점심시간이 될터다.

오늘따라 외투를 벗고 그냥 정장차림만 해 보고 싶어진다.
새벽에 집을 나서고 한밤에 들어올때면 낮의 따스한 봄기운을 느낄 새가 없었지만, 오늘은 거실 창 밖으로 보이는 햇살이 유난히도 따스해 보여 정장차림으로 나서리라 맘 먹는다.
거울을 한번 들여다 본후 오랜만에 구두에 솔질도 해본다.
며칠전 비가 내린 흔적이 아직 구두에는 남아 있다. 살풋 미소를 머금고는 가볍게 솔질을 하며 휘파람을 분다.

엘리베이터에서 세탁소 아주머니를 만난다. 두 층을 더 내려가니 아랫층 할머니께서 타신다.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신기하다.
아주머니와 할머니는 정장에다 검은색 노트북가방을 든, 이시간의 출근자를 묘한 눈길로 쳐다 본다.
마음속으로 빙긋 웃어 본다. '예... 지각했심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환한 바깥이 보인다.
원, 세상에... 출근길이 이리도 밝고 화사하다니...

마을버스를 탄다.
오늘 지각길의 마을버스안은 자리에 앉아 잠을 청하는 사람이 없다.
마실을 나서는 할머니, 할아버지. 예쁘게 화장을 하고 어디론지 외출을 하는 아주머니. 나만큼이나 늦게 출근하는 듯한 정장차림의 젊은이. 무엇이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수다에 여념이 없는 아주머니 두분.
맨뒷자리에 자리를 잡고 환한 바깥을 쳐다본다.
평소에는 10분도 채 안걸릴 버스가 엄청 늑장을 부린다.
길거리에는 차도 많다.
한 정류장에서 아이를 안은 젊은 아낙과 할머니가 버스에 오른다.
외할머니인 듯한 그 할머니의 눈길은 내내 아이에게 향하며 얼굴가득 미소를 가지고 있다.
빈자리에 아낙과 아이를 앉힌 할머니는 다른 자리가 비어도 앉으려 하지 않으며 외손주를 지키려는 듯 손잡이를 잡고 서 있다.
아낙의 가까운 곳에 빈 자리가 나 할머니가 그 자리에 엉덩이를 붙힌다. 하지만 아직도 할머니의 눈은 손주에게로만 가 있다.
할머니가 손에 든 가방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다시 내리며 까꿍을 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에게 재롱을 부리는 할머니. 주위의 시선에는 아예 아랑곳하지 않는다.
버스가 시장에 들어선다.
어둑한 시장길에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던 여느 때의 시장과는 다르다.
넘쳐나는 물건들, 넘쳐나는 사람들, 넘쳐나는 차들...
버스는 힘겹게 그 사이를 뚫고 나아간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상가를 걷는다.
지하상가 입구에서 떡을 팔던 할머니는 이 시간에 보이지 않는다. 하나도 팔릴 것 같지 않을 떡을 새벽부터 팔던 할머니였는데... 할머니의 영업시간은 벌써 끝이 났나부다.
지하상가의 대부분은 셔터를 올리고 밝은 불빛으로 가득하다.
화려한 봄옷으로 갈아입은 마네킹들, 현란한 조명을 받으며 빙글빙글 돌고 있는 핸드폰들이 상가에 가득하다.
나를 앞서 걸어가는 아가씨의 옷차림 역시 현란한데다가 스타킹조차 평소에 보지 못하던 망사스타킹이다.
이 시각에 지하상가를 걸어 출근을 하려는 내가 외려 더 이상해 보인다.

전철역은 여전히 붐빈다.
거무튀튀한 정장과 외투, 두툼한 목도리로 중무장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봄나들이를 나서는 듯 찢어진 청바지와 껑충한 배낭을 맨 여학생들. 손에는 베개를 해도 좋을 두툼한 책 한권씩을 들고 있다. 얼핏 어깨너머 보니 '헌법학총론'.
화려한 의상에 색안경을 끼고 한층 멋을 낸 아주머니. 상하의를 데님으로 맞춰 입은 듯한 아저씨. 엄마의 손을 마치 그네줄인양 흔들어 대는 꼬마. 그 꼬마에게 손을 흔들리며 다른 한손으로는 또다른 아이를 보듬어 안은 엄마. 그런 속에서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나.
이내 전철은 역사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문이 열리자 마자 쓰러질 듯 밀려 들어가 빈자리를 찾는 사람은 없다. 앉자 마자 눈을 붙이는 사람도 없다.
앉아도 그만 앉지 않아도 그만이라는 듯 사람들은 여유를 부리고,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책이나 신문 또는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고,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은 동행과 이야기를 하거나 이어폰을 통해 음악을 듣거나 환한 창밖을 본다.
시커먼 어둠만 가득했던 창밖이 아니다.
형형색색의 건물들이 스쳐 지나가고, 봄을 맞아 꽃망울을 터뜨린 나무들이 지나가고, '고객만족'이라고 쓴 거대한 글씨가 지나가고, 무슨무슨 신학대학 간판이 지나가고, 또 무슨무슨 신학대학 간판이 지나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건너편 철로를 따라 완행전철이 지나가고... 어둠속에 묻혀 있었던 그것들이 저마다의 색깔로 나의 시선을 어지럽히려 든다. 주독이 덜 빠진 나의 눈은 그러질 않아도 어지러움을 느끼는데 말이다...

지하철로 갈아타기 위해 지하로 내려간다.
빽빽하지만 질서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줄은 없다. 여기저기서 한가로이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뿐. 그러게 붐비는 기색도 아니다.
지하철이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사람들을 싣는다. 지하철안 여기저기에 빈자리가 보인다.
한껏 장난을 치며 들어오는 힙합풍의 두 녀석. 머리에 멋을 낸다고 했겠지만 내가 보기엔 빨다 만 밀대 걸레를 뒤집어 쓴 것 같다. 장난을 칠 것만 같던 두 녀석은 지하철이 움직이자 마자 각자의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재빨리 손가락을 움직이며 각자의 게임 세계로 빠져 든다.
그 옆자리에 앉은 젊은이는 웬 종이상자를 부시럭거리며 꺼내 들더니 이래저래 안을 들여다 본다. 포장 겉면에 써 있는 걸 보니 Military 어쩌구... 탱크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걸로 보아 액션피규어같은 장난감 같다. 이제는 PDA를 꺼내서 무언가를 열심히 본다.
다음 역에서 정장을 입은 여성이 전철에 오르고 내가 앉은 자리 앞에 선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긴 뭐하고, 물끄러미 그의 아래쪽을 본다. 흠... 오늘은 유난히도 망사스타킹을 자주 본다. 그 다음 역에서는 정장 바지차림의 여성이 내 앞에 선다. 옷맵시가 보통이 아니지만 얼굴과 헤어스타일이 캐리어우먼 냄새를 풍긴다. 어젯밤 만났던 옛직장후배가 생각난다. 멋진 정장을 입고 나타났었는데, 최근에 보험회사에 입사했다고 한다. 이 두 사람도 보험 컨설턴트일까.
맞은 편에서 누군가가 내리려고 일어선다. 두 사람이 뒤를 돌아보며 앉으려 하더니 다시 내쪽으로 돌아선다. 두사람 사이로 맞은 편 의자를 쳐다보니 웬 남자가 옷 매무새를 흐트린채 반쯤 쓰러져 있다. 아마도 밤새 피곤한 일을 겪은 모양이다. 아니면 상가에서 밤을 지샜던지.

내릴 역이 다가오자 핸드폰이 울린다. 어제 같이 술을 펐던 직장 후배 녀석이다.
'점심 드셔야죠...'
시계를 보니 정확히 12시다.
'해장국집으로 모이~!'
해장국집으로 들어선다. 아직 녀석들은 오지 않았다.
통유리가 설치된 쪽에 자리를 잡는다. 그 유리를 통해 바깥을 쳐다 본다.
모처럼만의 지각길이 유리 너머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점심시간이라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오버랩된다.
녀석들이 들어서고 점심을 먹고 나면, 아마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끝이 나고 평소대로 돌아갈 것 같다.
분명 같은 세월을 사는 사람인데도, 사무실에 있을 나 하고는 거리가 먼, 짧은 경험을 가진 것 같다. 왠지 나의 삶보다 여유가 있어 뵈는 것들 말이다.
내가 모르는 생활은 이 이후의 시간에도 계속될 것이다.
그래, 가끔은 지각을 하자. 정해져 있는 틀에서의 삶, 일탈에서 오는 또다른 삶. 그것을 가끔은 느껴 보자.
오늘은 마을 버스를 타고, 내일은 환승지하철을 타 보자. 떄로는 택시를 타고, 떄로는 걷기도 해 보자.
쳇바퀴처럼 도는 삶에서 또다른 생의 활력소를 찾기 위해. 그리고 맘껏 넘쳐나는 여유를 가져보기 위해.


Posted by 털보

2003/03/14 18:20 2003/03/14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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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asy 2003/03/26 14:56 # M/D Reply Permalink

    이제보니, 지각이란 참 좋은 거였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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